
가만 눈을 감았다. 세상은 모두 하나하나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저는 늘 꿋꿋하게 감상자이기만을 택했다. 미세하게나마 감정의 질을 느낀 뒤엔 망가뜨리고, 다시 새 작품을 찾고, 다시 제 마음껏 기워 망가뜨리고. 하지만 되풀이되는 이 과정에도 슬슬 저는 신물이 나나 보다. 또한 눈앞의 사람은, 이미 자신이 손댈 수 있는 선을 아득히 넘어선 지 오래다. 이젠 오히려 자신이 너라는 작품에 의해 잠식당했다. 곧 이는 사물과 사람 사이라 할 수 없으니, 따라서.
"그 말 철회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판단해 보기로는, 로빈은 작품은 될 수 없어."
"어?...왜?"
문득 제 말에 당황하는 너를 보곤 작게 웃는다. 저 댕그런 눈이라니. 어쩐지 당혹감에 흔들리는 듯도 보였다. 그리 무거운 이유는 아니니 저럴 필요는 없을 텐데. 고개를 들고 달빛을 아련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작품'이란 호칭은 말이지. 내 기준엔 내가 그것을 감상하는 위치에 있을 때나 쓸 수 있는 표현이야. 즉 내가 보는 것과 나 사이에는 선이 그어져 있다는 거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난 감상만 하고 끝나니 영향을 받아봤자고, 이미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를 내가 굳이 다시 쓴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좀 이상하지만, 아무튼 난 그런 이유로 세상을 작품이라 부르며 살아 왔어."
파멸이든 메리배드 엔딩이든, 작품에게는 늘 제 입맛대로 끝을 맺어 주었기에 얼핏 파괴자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사실은 이랬다. 잠깐 따뜻함을 주고 사라지는 성냥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저는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할 줄 모르는 인형이었고, 따라서 제아무리 누군가의 감정이 밀려든다 한들, 발치에 잠기는 이상을 넘기지 못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