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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 보면 한 번도 기도 중에 소원을 말해본 일이 없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기도에 욕심을 담지는 말라고 했다. 아직 부모가 하늘처럼 무서울 나이다. 어린 심경에 이는 지켜야 할 규율처럼 들렸다. 하지만, 말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소년은 언젠가 신부님께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부모님께도 털어놓지 못하는 걱정이 있거든 성모님께 털어놓아도 좋다며, 그리하면 제 상처를 분명 보듬어주실 거라며. 만물의 어머니는 자애로우시니 안식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살그머니 움직였다. '행복해지고 싶다'. 두루뭉술하게나마 소원을 떠올렸다. 하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 막연해서, 아이는 좀 더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저를 사랑해 주셨으면, 아니야. 그건 이미 포기한 지 오래야. 어머니는, 아마도 사랑해주고 계시다고 일단 생각했다. 형과 누나들이 저를 좀 더 아껴 줬으면, 이것도 아니야. 어차피 나는 줄넘기 놀이에 낄 수 없었는걸. 돈을 많이 벌어서 엄마가 우는 날이 없었으면, 아니지. 이건 어머니를 위한 기도잖아.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소년은 손을 뻗어 곁에 있던 낡은 곰인형을 들어올렸다.

  "...저, 제가 아끼는 곰인형이에요. 그런데 너무 낡아서...곧 죽을 것 같아요. 저, 이것마저 없으면 정말로 외톨이가 돼요."

  외톨이. 단어를 내뱉자 소년의 입술이 작게 떨렸다. 눈앞이 일렁이더니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인형은 소년의 말대로 언제든 목마저 떨어질 것 같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소년을 고독으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다. 또다시 소리없는 울음이 시작되었다. 언제부터 눈이 부어 있었던 걸까. 독방에는 그 흔한 시계조차도 없었다.

  "친구가...필요해요. 뭐가 나쁜 짓인지 모르지만, 안 된다 하면 안 할게요. 멋대로 제 얘기만 하지도 않고, 놀아 달라고 떼쓰지도 않을게요. 친구랑 안 싸우고 잘 놀 자신 있어요. 약속해요."

  띄엄띄엄, 겨우 문장을 이루며 소년은 제 간절한 마음을 성모께 바치기 위해 노력했다. 마음 속으로 이상적인 친구의 모습을 그렸다. 잘 웃어주는 사람이 좋아 웃는 얼굴을 그려넣었다. 잘 놀아주는 친구가 좋아 항상 뛰는 것 같은 다리를 그려주었다. 소소한 말이나마 들어주길 바라 귀를 그려주었다. 항상 저를 따뜻이 바라봐 주길 바라는 마음에 맑은 눈을 그려주었다. 급하고도 어설프게 그려진 '친구'를 성모님께서 계신 곳을 향하여 내밀었다. 부디 이것을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가져다 주셨으면. 그 마음만으로.

"그러니까...누구든 제 옆에 있게 해 주세요. 혼자가 되지 않게 해 주세요. 소중히 할게요. 착한 아이 할게요. 사랑은 잘 모르지만, 사랑해 볼게요. 그러니까, ..."

  눈앞이 흐려지고 물이 고인 듯 일렁였다. 곰인형의 어깨와 등이 축축하게 젖도록 울었다. 성모님께선 이 말을 들어주실까. 함께 기도해 주실까. 예수님께, 하느님께 이 간절한 마음을 전해 주실까. 흐느끼며 한참을 울고 나니 머리는 지끈거렸어도 마음만은 오히려 후련했다. 희고 단정한 옷소매로 주섬주섬 눈가를 닦아냈다. 얼룩이 져도 괜찮았다. 겨우 가라앉았던 눈가가 다시 빨개지고 말았지만 괜찮았다. 시야가 돌아올 때까지 한참 고개숙인 채 훌쩍였다. 온 기력을 다해 자신을 내보이고, 무력하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심에서도 외곽지, 제 마음과 정반대로 청명하기 그지없는 밤하늘이 보였다. 겨우 눈을 깜박여 그 눈부심을 가만 바라보았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한 지 넷째 날 되시던 때에 저 별들을 만들었다지. 언제나 해 왔듯 반짝이는 별들 아래서 마음을 천천히 다스렸다. 그러다, 문득.

  "...-"

  보기 드물게 선명한 빛줄기 하나가 밤하늘에 포물선을 그렸다. 생애 처음 보았던 별똥별에 어쩌면 소원을 빌었을까. 아니, 이는 제 기도에 대한 응답일지도 몰랐다. 기력을 잃고 흐려졌던 소년의 눈이 점점 맑아져 왔다. 비록 어디로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찰나의 선물에 그치지 않을지도 모르건만, 그 잠깐의 빛만으로도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며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그래. 그것이 아이가 살며 가진 첫 번째 희망. 오로지 주와 저만이 아는 기도 아래 세워진 어느 이름모를 빛이었다.

  창 밖에 어린 달빛을 오롯이 올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실체 없는 신을 향한 기도를 끊임없이 올렸다. 눈물이 말라붙어 눈가가 뻑뻑했다. 깊은 밤중 어린 소년의 머리맡을 수마가 덮쳐왔으나 아이는 결코 손을 놓는 법이 없었다. 한 알, 두 알, 어려워서 도통 알 수 없지만 집안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던 목소리들을 따라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문득 몸을 움직이면 오늘도 맞은 곳이 옷에 쓸려 아려왔다. 아픔에 흐느끼면서도 제 할 바는 멈추지 않았다. 고요함 속에서 작디작게 아이의 목소리만이 다락방을 울렸다. 묵주가 3바퀴 돌아가고 소년의 손이 문득 멎었다. 식은땀이 비로소 밤공기에 식어가고 있었다. 목소리가 멈추면 발 끝에서부터 조금씩 검은 손이 기어올라왔다. 더듬거리며 달팽이가 기어오듯 아주 느렸다. 소년은 옛적부터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저것은 언제든 제 심장을 쥐어틀어 죽일 것이라. 싫고 두려워서 다리를 움츠려 빼내면 벌거죽죽한 종아리가 아파왔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멈추면 다시 기어 올라왔다. 허벅지 아래쪽까지 올라왔을 적에 어둠은 소년에게 언제나처럼 속삭였다. 일리야, 가엾은 일리야. 이렇게 기도한다고 엄마랑 아빠가 널 받아주진 않을 텐데. 차라리 오래오래 눈을 감으면 안식이 찾아올 텐데. 섬뜩한 조소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감았던 눈을 떴다. 달빛이 둥근 창살을 닮아 둥그렇게 소년을 감싸 지켜주고 있었다.

  소년은 잠깐 사이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지쳐 버렸다. 제아무리 경건한 기도를 한다 해도 아이는 결국 아이였다. 젖은 날개를 쉬게 하듯 눈앞의 낮은 테이블로 몸을 엎드렸다. 아이보리색의 묵주가 손에 감겨 하얗게 빛났다. 탁하고 멍한 눈이 되어 초점마저 잃기를 한참. 문득 묵주의 빛깔이 퍽 아름답다고 느꼈다. 오른손만을 들어 그것을 허공에 띄우니 같은 색의 십자가가 달빛에 희게 반짝였다. 마치 미사실 중앙의 거대한 십자가를 떠올리게 했다. 흑백으로 숨을 조여오는 집에서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빛. 부모님에 의해 강제로 시작하게 됐지만, 모순적이게도 소년에게 있어선 유일한 구원의 시간이었다. 거짓된 음성들을 들을 바에야 차라리 아무것도 없이 고요한 게 훨씬 나았다. 감정이라곤 조금도 깃들지 않은, 공허함뿐인 소년의 눈이 십자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성모님, 예수님.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던 질문을 허공에 던졌다.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분명 성모님도 예수님도 우리의 곁에 함께 하신다 들었는데. 그런 것치곤 항상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외로워요."

  기도가 형식을 잃었다. 늦가을의 잎새가 땅에 떨어지듯 소년이 고개를 떨구어 다시 엎드렸다. 메마른 머릿속이지만 누군가가 심어준 상상은 있었다. 성모님과 예수님께서 나란히 앞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봐주고 계시다고 믿어 보았다. 그리고 그들을 부모 삼아 아이는 제 아픈 구석을 말했다. 그러곤 말없이 곁을 바라보았다. 솜이 터져 또 수선해야 하는 곰인형이 곁에 시체처럼 나동그라져 있었다. 현실에 쫓기던 순간마냥 금세 눈길을 돌렸다. 늘 무언가를 안고 있고 싶다는 이유로 항상 갖고 다녔지만, 소년도 실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저 인형을 졸업해야 했다. 또한 자신의 공허는 인형이라는 '물건'만으로는 결코 채워낼 수 없었다. 소년이 뒤를 돌아볼 때마다 그 곳엔 깊디깊은 수렁이 있었다. 너무나 검어서 안이 보이지도 않는 수렁. 그리로 떨어질까봐 늘 앞만 보고 걷고 뛰지만 손을 잡아줄 이 또한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또한 죽음을 생각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저 숨 닿는 대로 뛰고 또 뛰었다. 오늘처럼 쫓기다 지쳐 무릎꿇는 날에도 소년의 마음은 늘 우울과 결핍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제 옆에 있어주지 않아요."

  외로운데 형도 누나도 저랑은 놀아주지 않아요. 학교에 가도 마찬가지에요. 다들 제가 이상하다는데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어요. 아빠는 제가 정신병이 있댔어요. 엄마는 제가 낫게 하기 위해 기도하시겠대요. 저도 낫기 위해 기도하라는데, 전 아프지 않아요. 기침도 안 하고 열도 없어요. 색 여린 입술로 읊조리듯이 스스로를 이야기했다. 생각의 흐름을 따라서 이것저것, 속에 쌓이기라도 한 사람처럼 꺼내놓다 보면 문득 이게 아닌데, 하고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반쯤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그래서 난 무얼 말하려 했더라. 소년의 입술이 한참 뻐끔거리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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