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엄마, 엄마."

  정적이 드리운 집안에 작은 발소리가 통통 울렸다. 다시금 말끔히 수선된 곰인형을 안고, 소년이 보기 드물게 밝은 표정을 하고서 어머니의 곁을 지켰다. 오후의 햇살이 찬란하게 아이의 미소를 비추고 있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일리야. 즐거운 일이라도 있었니?"

  "응. 어제 하느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 주신다고 약속하셨거든요!"

  "약속? ...어떻게?"

  어머니의 눈이 둥그래지며 아이를 쳐다보았다. 어린 나이에 벌써,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히려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했었다. 곧 아이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거실로 나갔고, 어머니 또한 주방을 지나 거실의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는 채 자리에 앉지도 않고 테이블 근처를 느리게, 왈츠를 추듯 돌며 어머니의 곁을 지키다, 어느 순간 무언가 수줍은 듯 맞은편에 서서 꼼지락거렸다.

  "어제 밤에도 기도했었거든요. 인형이 너무 낡아서, 새 친구를 달라고 했어요. 제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잘 놀아주고, 같이 웃으면서 옆에 있어줄 친구를요."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더니요,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졌어요! 엄청 크게, 쭉- 하고요. 그렇게 큰 건 처음 봤어요. 빛을 따라가면 언젠가 제 친구가 있는 곳까지 닿을지도 몰라요."

  "흐음-...그럴지도 모르겠구나. 그런데 일리야."

  "네?"

  "기도는 조심해서 하라고 했을 텐데."

  "아, ..."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저 좋은 일이라고만 여긴 나머지, '기도에 함부로 욕심을 넣지 말라'는 금기를 깼음을 고스란히 말해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담담한 얼굴을 한 채 아이를 바라보았고, 들떴던 소년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창백한 그늘이 졌다. 별 수 없다는 듯 착잡한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는 아이를 쓰다듬었다. 그나마 사고를 친 게 어머니의 앞이어서 다행이었다.

  "일리야는 친구가 갖고 싶니?"

  "...네."

  "그러면 혹시, 이건 생각해 본 적 있을까. 어떻게 하면 친구를 잘 만들 수 있을까- 라던지."

  "...내 이야기만 하지 말기, 친구에겐 고운 말만 쓰기, 친구와 장난칠 땐 함부로 허락없이 때리지 말기, ..."

  "하나 더 있지?"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아껴주기."

  "하지만, 엄마. 저는..."

  "방금 말한 대로만 해도 친구들은 분명 생길 거란다.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는 거야. 거기서부터 시작되어야지."

 

  "...엄마,"

  "일리야는, 그걸 안 하고 있는 거잖니."

  "... ..."

  아이의 말문이 막혔다. 소년은 방법을 '몰랐다'. 어떻게 해야 마음을 여는 걸까. 무엇이 진심어린 대화인 걸까. 사랑이란 무엇인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금 같은 질문을 떠안고 생각이 같은 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무엇이 사랑인가요, 물어보고 싶었지만 눈앞의 이는 대답해 주지 않겠지. 그들에겐 당연히 있는 마음이 제게는 없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대답이 겉돌고 만다는 사실을, 이제 소년은 질려버릴 정도로 잘 알았다. 그래서.

"...노력해 볼게요."

"그래. 언젠가 분명, 하느님께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끄실 거야."

  또다시 기약없는 말로 어머니를 따스히 웃게 했다. 어머니의 마지막 조언은 소년의 마음에 닿지 못했다. 어머니를 향하여 애써 미소지어 보았지만, 사그라드는 등불처럼 얼마 안 가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따스한 손길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럴 때면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잠깐의 시늉으로라도 우선은 수용하고, 침묵으로 일관한 뒤,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뿐. 이런 집에서 함부로 풀어지고 말았던 스스로를 탓하며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제 방은 자신이 가장 답답하다고 여기는 곳이자, 동시에 그나마 가장 안정감을 주는 곳이기도 했다. 문을 닫고 몰래 걸어잠근 뒤 숨을 참고 있던 사람처럼 기나긴 한숨을 내었다. 기도를 좀 더 소중히 했어야 했다. 후회해봤자 남는 것은 없지만, 어쩐지 소중한 일기장을 실수로 빼앗겨버린 기분이 들어 쓸쓸함만 더해졌다.

  가만 눈을 감고 간밤에 유성이 지나간 궤적을 머릿속으로 덧그렸다. 그 별은 어디로 떨어졌을까. 별이 떨어진 어딘가에, 자신이 찾고 있는 사람이 있진 않을까. 다정함이 메마른 자신이라 해도 살면서 기대라는 걸 해볼 수 있다면, 저는 그것을 그 별에게 걸어주고 싶었다. 외로움이 끝나고 누군가가 제 곁에 있어주는 상상을 했다. 상상의 나래가 일찌기 꺾여버린 소년의 힘으론 그의 형상을 채 떠올려볼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따스한 존재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다 떨어지도록 여전히 제 곁에 있는 이 곰인형처럼, 언제까지고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 결코 헛되이 먼저 떠나지 않을 사람. 지금의 제 주변 사람들처럼 함부로 자신을 상처주지 않는 사람. 천이 덧대져 볼을 부빌 때면 부위마다 질감이 다른 곰인형을 안고 침대에 누웠다. 잠이 들기 전에 마지막 의식처럼 읊조렸다.

  "부디 어른이 되어서도, 제가 이 언약을 잊지 않도록 도와 주세요."

  설령 풍파 속에 처한다 하여도 이 소망만은 잊지 않기를. 과거의 일리야는 현재의 헤리틱에게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