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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한 번도 내 편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일리야 미하일로프는, 아니, 헤리틱은 회고했다. 제 아비의 안티테제와 같은 존재로서 세상의 악이 되었고, 지나친 이타주의와 가식을 향한 증오의 불길은 빛의 총탄이 되어 수많은 이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이 아름답게. 또한 제 손으로 거머쥘 수 있는 가장 찬란한 것들을 수집하면서. 헤리틱에게 있어 사람의 인생은 비극이 있어 비로소 빛날 수 있었다. 하여 저는 여태 여러가지 모습을 했었다. 어떤 때는 아름다운 늪지대가 되어 제 품으로 안겨들어 죽을 오필리어를 기다렸다. 어느 때는 질투심을 부추기는 녹색 눈의 괴물이 되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그저 곁에서 비참한 현실을 관조하고 또한 부추기는 어릿광대를 자처했다. 어떤 색이든 될 수 있는 프리즘처럼 온갖 색으로 세상을 비추었다. 그리하여 모은 눈물만 몇이며 또 몇을 광기에 빠뜨렸는가. '헤리틱'은 결국 '빌런'이었고 악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유순한 낯을 무기 삼아 하얀 천사의 날개를 뒤집어 쓰고 다정함을 연기하여 덫에 걸리게 하는 악마였다.

  이는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었다. 제게 있어 너는 한낱 '수집품'에 지나지 않을 예정이었다. 악에 받쳤어도 자신의 선함을 끝내 잊지는 못했던, 그 모순 사이에서 여기저기 금가 깨질 위기에 처한. 너는 제게 위태로움을 내비쳤고 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때 히어로였으니 오래 가지고 놀 순 있겠지. 하지만 우리의 미래에 무엇이 있든 저는 네 절망이 되어줄 참이었다. 네게 과실을 건네 환심을 사고, 네 약점을 완전히 틀어쥘 존재가 되는 순간에 네 신뢰를 박살내려 했다. 수단은 무엇이 좋을까 고민하며 퍽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네가 평생 죽이고픈 대상이 되어 볼까. 혹은 구원자인 척하며 이내 네 눈앞에서 죽어 희망을 꺼뜨려버릴까. 자기파멸적인 생각마저 하며 네 앞에서 차가운 광기를 가감없이 드러냈었다. 하지만—

"...꿈을 꾼 건 네가 아니라 나였지."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너의 간절한 포옹 속에서도, 따뜻함을 알려주겠노라는 너의 애정어린 말들에서도 저는 비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참을 붙들고 설득한 덕에 '헤리틱' 안의 '일리야'는 네게로 손을 뻗었지만, '헤리틱'은 여전히 남아 '일리야'에게 불신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나약한 선택을 할 수가 있을까. 기나긴 대화가 끝나고 호텔에서 너를 또 안았으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너를 제 곁에 뒀으면서도 밤이 되니 자아가 또다른 자아를 증오하고 있었다. 묻어뒀던 진실 앞에서 악마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했다. 너는 저를 구원한다 했지만 과연 믿어도 좋은 걸까. 아니, 믿을지의 여부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 더 이전에 저는 누군가에게서 온정을 바라던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싫었다.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잘 알면서 눈앞의 사람이 선하다는 이유만으로 덥석 잡았단 말인가. '헤리틱'은 '일리야'가 더이상 약해지지 않기 위해 쌓아올린 견고한 성이었다. 네가 이것을 무너뜨리기라도 하면, 나는, 지난 몇십 년간의 '빌런 헤리틱'은 어떻게 되는 걸까.

  뒤늦게 몰려오는 자괴감과 후회에 흔들리는 자신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스위트룸의 커튼 사이로 달빛이 한들거리고 있었다. 느리고 무거운 걸음으로 욕실에 가 물을 채우고, 몸을 밀어넣었다. 물을 조절하지 못해 밖으로 꽤 흘러넘친 것 같은데, 멍한 정신으론 그조차도 신경쓰지 못했다. 나답지 않아. 내가 아니야. '나'는 뭐였지? 온기가 고팠던 자신도, 사람을 거부하는 자신도 전부 다 '일리야 미하일로프'이다. 살면서 모순 한두 가지쯤 가질 수야 있지. 하지만 누군가에게 구원받는 순간 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전후로 모든 것이 두려웠다. 오랫동안 존재조차 잊고 있던 검은 손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다. 돌이켜 보면, 둘째 형을 제 손으로 죽였던 그 날은, 제가 새장으로부터 탈출한 날이자 곧 자신이 수많은 검은 손들의 늪에 잡아먹힌 날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로운 것 같았지만 사실 자유롭지 않았구나.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물인가. 과거로부터 완전히 도망칠 수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지만, 그래도 조금은 기대했었는데.

  도와줘. 스스로가 내뱉고도 믿을 수 없었던 단어를 다시금 읊조렸다. 도움이 필요할 만큼 나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아니, 도움 따위 바라지 않고 살아가야 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었다. 살기 위해서 택한 방법이지만 어찌 생각하면 그것 또한 스스로의 약한 이면을 방치한 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어차피 아무도 돌봐줄 이는 없었다. 사랑 따윈 알지도 못하는 제가 스스로를 돌보는 방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차악이었다. 차악임을 알고 있기에, 또한 쌓여버린 제 안의 악을 풀고 싶었기에 의도적으로 한 선택인 만큼 질은 더욱 나쁠지도 몰랐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면 아래로 자신을 끌어갔다. 깊은 심해에 잠기듯 한없이 우울에 빠져들었다. 검은 손들이 저를 등 뒤에서 끌어안고, 입을 막고, 눈을 가리고, 콧날을 더듬어 온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럼에도 저는 웃고 있었다. 적어도 그 지옥보다는 낫다는 생각만으로 오랫동안 도망쳤던 수렁에 몸을 맡겨 버린 셈이었다. 너는 이런 자신을 미리 꿰뚫어 보고 끌어안아 줬던 것일까. 그렇다면 너는 분명 저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이다. 제가 함부로 깨뜨리기엔 너무나 견고하고 큰 그릇이다. 과분하리만치 아름다운 존재다. 도금으로 스스로를 메워 화려하게 재탄생한 작품 앞에서 군데군데가 깨진 인형은 몸을 가릴 수단조차 찾지 못했다. 해서 오히려 더 수치스러웠는지도 모르지. 너의 간절한 포옹 속에서, 따뜻함을 알려주겠노라는 너의 애정어린 말들에서도 저는 때때로 비참함이 치밀고 말았더랬다. 전혀 추하지 않다고 네 입으로 간증해 주었는데도.

"...싫어."

  무엇이 싫은지도 모호했다. 아니지. 그냥 모든 것이 싫었다. 구원받을 기회 앞에서도 아무튼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보고 싶지 않았다. 저는 더이상 알렉세이의 아들이 아니었지만 지난날의 흔적들을 보는 게 어찌 달가울 수 있을까. 이미 제 손이 닿기도 전에 꽃피고 만 사람을 곁에 둘 이유는 또 무엇일까. 악마는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의 구원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건지도 몰랐다. 그저 제멋대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충분했던지도 몰랐다. 때때로 가만히 사는 것만으로도 이유없이 숨이 가빠지는 때가 있었다. 그런 제게, 네가, 우리는. 물이 차가워질 때까지 긴 시간을 물 속에 잠겨 있었다. 더 회고할 수 없을 때까지 끊임없이 되풀이하다 결국 물 밖으로 나왔다. 이 또한 저답지 않다. 고통스러운 굴레를 늘 그랬듯 자기 손으로 찢고 덮었다. 나는 약하지 않아. 난 어디서든 빛날 거야. 검은 수렁에 몸을 맡기는 도박도 저질러 봤는데 더한 것인들 어떠랴. 이 삶은 결국 한평생 제 손으로만 가꾸리니, 어쩌면 똑같이 자학적인 의미에서 네게 제 마음을 의탁했다. 거짓이든 아니든 저는 추하지 않다고, 일리야는 일리야일 뿐이라고 말해준 첫 사람이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위안 삼는 저는 빌런 헤리틱이 보기에 아직 약해빠진 일리야 미하일로프일 뿐이다. 그거면 됐어. 충분해.

 

 

  서늘해져가는 체온을 안고 욕조에서 다시 일어났다. 느린 손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여전히 옷은 걸치지 않은 채 네 등 뒤에 누웠다. 살갗에 위로받고 싶어 너를 끌어안으려 했지만, 이불에 싸여 따뜻한 너와 달리 제 몸은 한없이 식어 있어서 문득 닿지 못하고 팔을 접었다. 순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어쩌면 이것이 너와 저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네게 닿으면 저는 분명 데일 것이다. 너를 차갑게 식혀 질식사시키려던 시도는, 이제는 두 번 다시 할 수 없으리라. 이런 상황에서 타인에게 의존한다는 건 무엇일까. 한 번도 해 본 일이 없어 두려웠다. 일생을 불신만 쌓으며 살았던 제가 과연 네게 스스로를 잘 의탁할 수나 있을지.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기울어 옮겨진 달빛이 자신의 발치를 감싸고 있었다.

 

 

  "...약속, 잘 지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잠든 네 뒤에서 작게 속삭였다.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저는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가장 힘든 길을 가게 될 테니 이 내가 자존심도 잃고 비척이거든 네가 손을 잡아 달라고. 제가 갈 길이 더이상 부끄럽고 처절한 것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겨우 네 등 뒤에 이마를 대었다. 그대로 지친 듯 눈꺼풀을 닫았다. 삶은 지옥이지만, 조금이나마 덜 지옥이기를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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