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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행기 탑승까지 앞으로 20여 분. 필요한 소지품들을 다시 점검했다. 출입국 수속을 마친 여권과 티켓, 각종 증빙서류, 지루함을 달래줄 음악 리스트와 충분한 양의 배터리, 추후로 벌어질지 모를 법정 공방에 쓰일 중요 자료 몇 장. 캐리어 2개 분량의 짐은 이미 맡겨두었고. 차분한 손길로 돌아본 후엔 홀로 다시 벤치에 앉아 쌀쌀한 러시아의 공기에 몸을 맡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항 안은 오늘도 사람들로 퍽 북적였다. 겨울을 닮아 칙칙한 옷들을 입은 사람들 사이로, 하하호호 웃으며 다음 게이트를 향해 가는 가족들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두 남매. 여자아이의 연핑크색 패딩만큼이나 해맑고 깜찍한 미소가 참 인상적이었다. 보나마나 어디로 여행을 떠나는 거겠지. 혹은 친척집에 방문하고자 비행기를 탄다던가. 지난날과는 달리 그 정경을 바라보면서도 괜히 웃음이 났다. 어쩐지 홀가분함이 먼저 찾아오는 탓이었다.

 

 

  알고 있었다. 아주 옛날부터 이미 체념하고 있었다. 빌런이 된 날부터는 아예 확신하며 살았었다. 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더이상 저런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예상은 틀림없이 종지부를 찍었다. 한때 혈육을 죽이고 집을 뛰쳐나왔던 일리야 미하일로프는, 이제 적법과 위법을 통틀어 자신을 망가뜨린 존재에게 복수를 하는 데에 성공했다. 프라이버시란 미명하에 꿋꿋이 비밀을 지켜주던 러시아 정부도 더이상 자신을 막을 권리가 없었다. 계약은 이행되었고, 진실을 안 이들이 하나둘 자신의 편이 되어 주었다. '사연 있는 빌런'이라는, 어쩐지 빌런치곤 좀 값싸게 들리는 호칭을 갖게 되긴 했지만, 나쁘진 않은 결과물이었다. 러시아의 대중들은 나라를 빛내던 SS급 히어로의 이면에 크게 동요했고, 누군가는 애써 부정했으며, 누군가는 그런 그를 나라를 위해서라도 내버려둘 수 없다며 끌어내리길 소원했다. 한때는 정부에서 모함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왜냐하면, 제 아버지의 설레발 덕분에 길어질 수도 있었던 싸움이 훨씬 짧아졌기 때문이었다. 서류 봉투 뒤의 그을린 흔적을 슬며시 더듬었다. 아아, 아버지. 알렉세이. 저주 앞에 나약해지는 그 이름이여.

 

 

  "그렇게 해서까지 자신의 치부를 지우고 싶었나. 머저리는 머저리네."

 

 

  한창 공방이 진행되던 중, 러시아에 자신이 머물고 있는 도시 한정으로 대대적인 빌런 소탕작전이 벌어졌었다. 말로는 범죄 집단 진공 작전이라는데, 누가 봐도 타겟이 뻔하지 않은가. 일찌기 정보를 접수해 도망쳤으나 아버지의 심복 되는 몇몇 S급 히어로들이 추격해온 탓에 난리도 아니었지. 혼자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 피신하기를 며칠. 아마 연합 측에서 신변을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그대로 살해당했을 것이다. 다행히 그들을 제외하면 어렴풋이나마 진실을 알던 히어로들이 알렉세이를 애써 방관하거나 반대했고, 더이상의 혼란 없이 들짐승을 포획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정부 측에서 알렉세이를 빼내 주려는 계획이 다양하게 보였으나, 히어로 연합 측에서 들끓는 여론을 벗삼아 이마저도 차단하는 데에 성공했고, 알렉세이는 더이상 '히어로'라는 호칭을 달 수 없게 되었다. 지난 몇 달이 폭풍처럼 지나갔음을 새삼 느꼈다. 한편으론 통쾌하기도 했다. 이것이 제가 메피스토에서 노력해 얻어낸, 그리고 일생을 다해 만들어낸 가장 좋은 결말. 악인에게도 꿈은 있다더니 꼭 저를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닐까. 빌런이지만 이루고 싶은 열망이 있고, 평범하게 갖고 싶은 것이 있고, 자신이 오래토록 머물 곳을 원할 수도 있고. 결국 저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선택들 중 하나를 했을 뿐이라 여겼다. 다만 너무나 바라 왔기에, 세상에 더없이 소중하고도 애처로운 선택이 되었을 뿐이라고.

 

 

  때마침 비행기에 오를 시간이 되었다.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특유의 너른 폭으로 게이트 쪽을 향해 갔다. 통로를 따라 걸으며 앞으로 올 일이 거의 없어질 고향 땅을 바라봤다. 활주로 너머는 여전히 지겨운 설원만 넓게 펼쳐져 있었다. 더이상 제게 아무런 영감도 주지 않을, 이 지겨운 고국을 떠나 저는 또다른 세계로 갈 예정이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메피스토에 처음 갔을 때부터 이는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다만 제가 구상했던 거랑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말하자면, 어딘가 더 다정한 빛을 띠고 있다고 해야 하나. 때마침 메세지가 도착했고, 잠시 멈춰 그것을 펴 보곤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 조심해서 와. 기다릴게. 얇은 옷 잘 챙겼지?

 

 

  발신인 로빈 카펜터. 줄여서 로빈. 그 위로는 헤어진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고받았던 메세지들이 수두룩했다. '응. 조언대로.' 답을 보내주고 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가 있을 때의 기분은 익히 겪었으나, 거기서 누군가가 자길 기다려주고 있다니 참 생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어째선지, 싫지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어쩐지 좋았다. 자잘한 준비까지 합해 어언 2개월하고도 반. 때는 벌써 4월이었고 저는 그가 몹시도 그리웠다. 행여 그가 제 일에 휘말릴까 싶어 부르지 못했음이 한스러울 정도였다. 홀가분하지만 한편으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던 만큼, 몸과 마음이 모두 안식을 원하고 있었다. 메피스토에서 지내는 동안 저는 그를 가까이서 경험했고, 지난 밤의 속삭임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약속을 지켜 주었다. 제 발걸음은 믿음이 서린 걸음이다. 네 곁으로 가면 분명 편히 쉴 수 있을 거라며, 확신을 안은 채였다.

  게이트가 닫히고 자리에 앉았다. 창가를 바라보며 이어폰을 꼈다. 때마침 해가 지기 시작해 하늘이 어스름에 잠기고 있었다. 그것을 잠시간 바라보다가는 플레이리스트를 켰다. 메피스토에서 지내는 동안, 혹은 그 이전부터 들었던 노래들이 쭈욱 지나가고. 어느 노래를 틀고서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 밤이 지나고 다음 밤이 돌아올 때 다시 너를 만날 수 있겠지. 타지에서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약속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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